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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2.26 작가 강홍구_디지털 푼크툼의 순간에도 아픔이 존재할까 2
- 2009.02.26 작가 이준의_디지털 이미지에 대한 수용자의 새로운 이해. 1
- 2009.02.26 작가 김선회_현실을 가두는 의도, 재현을 꿰뚫는 현실, 그리고 푼크툼의 농담
- 작가 강홍구_디지털 푼크툼의 순간에도 아픔이 존재할까
- 기술미학포럼/data
- 2009. 2. 26. 21:30
제 2회 기술미학포럼_작가 강홍구
본 문서는 2009년 2월 19일 기술 미학 연구회 주관으로 문지문화원 사이Saii에서 진행되었던 "제 2회 기술미학포럼: 디지털 푼크툼의 순간, 그리고 진정성"에서 유원준씨가 진행한 작가 김선회에 대한 발제 내용입니다.
디지털 푼크툼의 순간에도 아픔이 존재할까
강홍구 작가의 <드라마 세트> 시리즈, <오쇠리 풍경>시리즈 를 중심으로
포이에르바하 Ludwig Feuerbach는 19세기 중반, 당시의 사회의 모습에 관해 “사물보다 형상을, 원본보다 복제를, 현실보다 표상을, 본질보다 가상을 선호”한다고 언급하며 무한한 권위를 지닌 이미지의 시대를 예고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예고는 한 세기를 넘어 디지털 이미지로 점철된 현재의 상황에 이르러 더욱 유효해 진 듯 보인다. 왜냐하면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들은 그 근본적 체질 자체가 가상적으로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거 아날로그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사진이 현실의 순간을 포착하여 현재화하는 것이었다면, 그리고 그것의 (예술적) 가치가 실제적 상황과 사진가의 기다림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면 이와는 대조적으로 현재 디지털 사진의 경우 현실보다 표상을, 본질보다 가상을 선호하는 (포이에르바하의 언급과 유사한)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현재의 가상적 흐름은 결국 사진이 지닌 의미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분명히 과거의 사진은 현실의 단편을 추적할 수 있는 단서로서 기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디지털 사진은 어떠한가? 한 장의 디지털 사진이 우리의 현실을 대변할 수 있는가?
작가 강홍구의 작업은 이러한 측면에서 디지털 사진이 지닌 현실과의 관계를 조명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의 작업은 과거 아날로그 사진과 현재의 디지털 사진의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현실과의 지시적 관계들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러한 관계들이 현재의 디지털 사진의 가상적 기표의 허구성과 진실성에 관하여 일련의 성찰의 과정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본 글에서는 그의 작업 중, <드라마 세트> 연작 (2003)과 <오쇠리 풍경> 연작 (2004)을 중심으로 그의 사진에서 나타나는 현실 및 가상적 지표들에 관해 분석해보도록 하겠다. 우선 <드라마세트> 연작을 살펴보자. 작가는 드라마 혹은 영화를 위해 존재한 드라마세트의 허구성이 그 용도가 폐기된 순간부터 현실화(실체화)되는 순간을 포착하여 기호가 사물화되는 순간을 가시화한다. 그리고 드라마세트가 지닌 일회성에 의해 공허함과 가상성은 증폭된다고 설명한다. 그의 이러한 설명은 충분히 납득할 만 하다. 그러나 이러한 대비는 그가 사진으로 그러한 순간을 포착하면서부터 새로운 구도 속으로 ‘현실 – 이미지 – 가상’의 관계를 배치하여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사진으로 옮겨진 드라마세트는 그 인덱스가 가상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고유한? 가상성을 잃어버리고, 상징화된 지표로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물론 ‘드라마세트’라는 작품의 제목에서 이미지 속 배경의 출처를 찾아볼 수는 있겠지만, 작품 자체로서 인덱스의 허구성을 의심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아니 의심한다 하더라도, 작가가 포착한 가상의 그것은 실제의 그것과 중첩되어 관객들에게 인식된다) 여기에서 주목할 지점은 그가 선택한 오브제, 즉 드라마세트라는 일종의 현실 속 가상환경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공허함과 가상성이 다시 이미지 속으로 숨어버린다는 점이다. 따라서 감상자들은 이러한 사진 속 허구적인 배경을 보며 과거의 실제적인 역사적 순간을 떠올리게 되는 일종의 가상적 푼크툼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디지털 원본을 인덱스로 지닌 디지털 사진의 경우와 유사하다. 강홍구의 <드라마 세트>가 프린트 과정을 제외하고서 아날로그 적으로 이루어졌다 할 지라도, 위와 같은 과정을 거침으로 인해 이미 디지털 사진의 특성들이 발현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특징들은 후속 작업인 <오쇠리 풍경> 시리즈에서 조금 변환되어 나타난다. 위의 <드라마세트> 연작들이 지시대상 자체가 허구적인 것이었다면, <오쇠리 풍경>은 제목에서 명시하듯, 실재하는 행정 구역의 모습을 담은 작품들이다. 다만, 작가는 비행기 소음에 의해 이주 지역으로 결정 된 ‘오쇠리’의 현실을 파편화된 풍경 사진들의 파노라마적 이어 붙이기와 과장된 앵글로서 포착한다. 예를 들어, 비행기가 날아가고 있는 장면의 작품을 살펴보자. 항공기가 동시에 하늘에 배치되어 있는 장면은 현실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장면들이지만, 그러한 장면은 오쇠리의 왜곡된 현실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이 장면에서 하늘에 떠 있는 비행기는 현실에서의 지시 이미지이지만, 그러한 이미지가 중첩되어 나타나 가상적 순간이 되어버린다. 그러나 감상자는 그러한 가상적 순간들을 지표가 지닌 가상적 측면이 아닌, 가상이 투영된 현실로서 이해하게 된다. 결국, 이 작품은 데리다의 언급처럼, 감상자들이 그것이 의도된 코드에 의한 연출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귀속과정’을 거쳐, 필연적으로 그 지시대상을 연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하나의 결론을 도출해보자. 문제의 핵심이 디지털 사진이 가능케 한 이미지의 ‘현실 조작 가능성’ 및 그 ‘진실성’의 여부에 있다면, 이러한 문제 제기에 디지털 사진은 나름의 해답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즉, 강홍구의 <드라마세트>는 가상적 현실의 지표가 감상자들에게 그것이 지시하는 현실이 아닌 가상적 현실로서 이해되는 측면을 드러내고 있고, <오쇠리 풍경>에서는 현실적 가상의 지표가 그것이 의미하는 가상이 아닌 현실적 측면으로 인식되는 과정들이 나타남으로서 디지털 사진이 획득할 수 있는 진실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만약 과거 사진에서 드러나는 푼크툼의 순간이 현실을 바탕으로 한 개인의 체험적 인지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면, 강홍구의 작업들 또한 가상적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순간을 발생시키기에 충분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다만, 흥미로운 지점은 현실에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디지털 사진이 오히려 현실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가상의 순간들은 감상자들에게 순간의 진실성을 판단하기 위한 근거로서 현실을 더욱 반추하게 만든다. 따라서 사진 이미지는 디지털이라는 유전 인자의 전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실을 추종한다. 문제는 우리의 현실 자체가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글. 유원준 (미디어아트채널 앨리스온 편집장)
- 작가 이준의_디지털 이미지에 대한 수용자의 새로운 이해.
- 기술미학포럼/data
- 2009. 2. 26. 21:24
제2회 기술미학포럼_작가 이준의
본 문서는 2009년 2월 19일 기술 미학 연구회 주관으로 문지문화원 사이Saii에서 진행되었던 "제 2회 기술미학포럼: 디지털 푼크툼의 순간, 그리고 진정성"에서 허대찬씨가 진행한 작가 이준의에 대한 발제 내용입니다.
디지털 이미지에 대한 수용자의 새로운 이해.
이준의의 <Duplicity>시리즈를 통해.
디지털 카메라, 웹캠, 핸드폰 카메라, 인터넷 화면 캡쳐. 사진이라는 이미지의 생산은 보편화 되었다. 누구나 이미지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구나 디지털 기술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기술을 바탕으로 손쉽게 생산된 이미지를 변형하고 합치고 나눈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채집된 사진 이미지들을 공유하고 분리하고 합성하며 나아가 그러한 활동 자체를 유희로서 여기고 이를 즐긴다. 원본 이미지와 그것으로부터 만들어진 생성 이미지들의 진의 여부는 더 이상 중요치 않다. 모든 것이 조작 가능해진 세상, 디지털 세상은 이미 우리 곁에 있다.
이제 우리는 이미지를 그 어떠한 형태나 모습으로든 변화시킬 수 있다. 사진을 만드는 과정은 이미지의 가공까지를 모두 포괄하는 말이 되었으며 이제는 후자가 사진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데 더욱 중요해 보인다. 사진은 현실 그대로의 재현 혹은 현실의 투영이 아니라, 현실의 의미를 넘어선 시뮬라크르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퍼스에서 연유해 바르트가 핵심적으로 드러낸 현실에의 자취이자 증거로서의 사진의 인덱스성은 허물어 진 것인가. 이제 사진에게 있어 피사체인 현실은 무엇인가. 우리는 사진과 현실과의 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일련의 물음에 대해 작가 이준의의 작업은 그러한 변화된 인식과 결과를 잘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작가 이준의는 <Duplicity> 연작에서 사전 촬영된 이미지를 디지털 후처리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비현실적인 왜곡 이미지를 만들어 내었다. 작가는 이 과정에서 일반적인 컴퓨터 그래픽 프로그램의 전략을 사용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컴퓨터 그래픽은 과거 사진이 전략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미지를 만드는 사람의 주관적 의도, 즉 주체를 지워 현실과의 차이를 없애 객관적인 현실 투영의 모습을 갖춘다. 그런 과정을 통해 수용자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미디어의 존재를 잊고 자신이 그 대상물의 존재 속에 있다고 믿게끔 만드는, 스스로 몰입의 상태로 몰아가는 비매개성을 획득한다. 하지만 작가는 오히려 의도적으로 피사체를 왜곡시켜 주관성, 즉 작가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는 보는 자에게 미디어를 환기시킬 목적으로 만들어진 시각 표상 양식인 하이퍼 매개성을 드러내려 하고 있다. (볼터와 그루신, remediation)
그는 우리가 표면적으로 받아들이는 현실 그대로가 아닌, 현실 이면의 또 다른 현실을 드러내기 위해 카메라와 비디오에서 보이는 극사실적 이미지를 비사실적 이미지로 재생산했다. <Duplicity>연작 속에 드러난 도시의 풍경은 우리가 늘상 경험하는 도시의 모습이 아닌 기묘하게 왜곡된 모습으로 우리에게 대가온다. 이미지의 조작은 이 이미지의 전달자인 사진이라는 매체를 강력하게 부각시킨다. 그 점을 통해 작품은 우리가 위치한 현실은 여러 간접 매체를 통해서 매개된 세상이 우리에게 비춰지는 것이라는 점을 드러낸다. 이러한 하이퍼매개 이미지는 전달자인 미디어의 존재를 인식하게 하며 대상과 표상이 동일한 것이라는 믿음을 깨지게 한다.
이렇게 왜곡되어 실제의 현실로서의 인식점을 끊은 이미지이지만, 수용자는 수평과 수직 방향으로 길게 왜곡 처리된 이미지의 원리를 파악하고 그것의 원본 이미지를 파악할 수 있다. 디지털 이미지의 프로세스를 알고, 그것에 익숙한 현대의 수용자는 변형 이전의 이미지를 알아내고, 그 이전의 이미지에서 현실의 자욱과 그와 관련된 자신의 기억을 찾아낸다. 그러한 인덱스성은 현실과 수용자와의 끈이자 그에 대한 강렬한 감정인 푼크툼을 불러낼 수 있는 단초로서 동작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단지 기존의 사진에서만이 아닌 우리 주위에 놓인 모든 이미지 전반을 통해 발견할 수 있는 푼크툼의 가능성이라는 모습은 매체간의 혼용, 재매개화, 이미지의 사용과 소비에 익숙해 진 디지털 시대의 현대인들에 의한 결과일 것이다. 다만 여전히 사람들은 현대의 디지털 매체를 다루는 삶에서 체득한 이미지 처리과정의 경험를 통해 그들 앞에 놓인, 생성된 디지털 이미지에서 현실의 자취를 찾고 있다. 조작이 가능한, 현실의 족쇄를 풀어낸 이미지들 사이에서, 사람들은 그 스스로의 기억과 경험을 투영시켜 현실을 재구성하고 재이해한다. 미디어를 통한 간접 체험 자체가 환경인 사회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방법으로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글. 허대찬(앨리스온 에디터)
- 작가 김선회_현실을 가두는 의도, 재현을 꿰뚫는 현실, 그리고 푼크툼의 농담
- 기술미학포럼/data
- 2009. 2. 26. 21:13
제 2회 기술미학포럼, 작가 김선회
본 문서는 2009년 2월 19일 기술 미학 연구회 주관으로 문지문화원 사이Saii에서 진행되었던 "제 2회 기술미학포럼: 디지털 푼크툼의 순간, 그리고 진정성"에서 김상우씨가 진행한 작가 김선회에 대한 발제 내용입니다.
김선회에 대해서: 현실을 가두는 의도, 재현을 꿰뚫는 현실, 그리고 푼크툼의 농담
의도된 대조는 나에게 아무런 효과를 주지 못한다. 이처럼 나의 흥미를 끄는 세부요소는 의도적이 아니거나 최소한 완전히 의도적은 아니며, 필경 의도적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바르트)1. 김선회의 작업은 읽기가 좋은 사진이다. 읽기가 좋다는 것은 작가의 기획이 뚜렷하여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의 사진을 세세히 분별해 보자.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런던의 풍경이다. 공원, 성당, 박물관, 거래소 등등, 대부분 유럽에서 볼만한 건물과 배경이다. 아니 그곳을 가보지 못한 경우라면 그렇다고 상상하는 풍경일 것이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한국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음은 작가의 현존이다. 김선회는 풍경에 자신을 던진다. 그것도 아주 작게, 풍경의 하찮은 일부로서. 만약에 그의 고백을 읽지 않았다면, 솔직히 있는지 없는지 확인조차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적어도 사진만 봐서는 말이다. 그렇게 풍경의 일부가 된 그는 작아도 너무 작고, 풍경을 채우는 대상은 화면 전체를 채운다. 거기서 그는 언제나 한쪽 구석에 경직된 자세로 차렷 한다. 그만큼 배경은 압도하듯 그를 둘러싸고 밀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2. 하지만 방아쇠는 아직 당겨진 것이 아니다. 앞서 지적대로 작가의 고백이 결정적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순식간에 사진에 의미를 고정시킨다. 이때부터다. 사진을 ‘읽는 방식’이 일변하는 것은. 전체를 찬찬히 훑던 시선은 숨은그림 찾기하듯 작가를 찾아내기 위해서 바빠진다. 관객은 작가가 확실히 그곳에 있었던 것을 증명하는 증인으로 떨어진다. 관객이 보충하고 상상할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그의 고백은 그만큼 명확했고, 사진은 충실히 문자에 정박했기 때문이다. “관광객도 아닌 외국인이 낯선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것은 이방인이 가질 수밖에 없는 흔들리는 정체성 때문이었다.” 사진의 구도는 작가의 진술로 완벽히 번역되는 것이다. 당연히 사진에는 작가의 현존만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그를 둘러싼 배경은 크기만 컷다 뿐이지, 모조리 허깨비에 불과하다. 사진은 작가의 현존을 축으로 마치 블랙홀처럼 급격히 수축한다. 그리고 멈춰선다.
3. 기획된 사진은 작가의 의도를 통해서 의미가 폐쇄되기 쉽상이다. 약호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푼크툼’이 존재할 여지가 약해진다. 물론 작가가 회화처럼 화면의 모든 것을 통제하진 못하므로, 현실이 은밀히 침투할 공산은 있을 것이다. 푼크툼은 작가가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들러붙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작가의 투시력은 ‘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존재하는 데 있다.”(바르트) 그것은 주체의 의지를 넘어서 현실이 ‘우연히’ 새겨둔 자국이다. 하지만 김선회의 경우 기획자체가 작가의 현존인 까닭에 이마저 가로막힐 공산이 크다. 일찍이 블로흐는 범죄소설의 출현이 소설이 퇴행하는 징후로 인식했다. 살아있는 인간들 사이에서 의미를 찾기보다 죽은 시체들 사이에서 추론하게 되기 때문이다. 김선회의 사진도 비슷하다. 생생한 의미를 생성하는 대신에 어딘가 붙잡힌 작가를 수색하는 일로 귀착된다. 당연히 보는 자 누구에게도 ‘보충’할 가능성은 줄어든다.
4.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것이 작가 한명의 특수한 사례가 아니라, 사진과 이미지의 일정한 경향을 보여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김선회의 사진은 작가의 현존을 기획하는 정도다. 하지만 작가가 사진의 모든 것을 통제하는 경우라면, 사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마치 회화처럼 말이다. 흥미롭게도 디지털은 그것을 가능케 한다. 사진과 회화의 경계는 묵묵히 소멸될 것이고, 사진에서 푼크툼의 억압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기야 현실자체가 심미화되는 마당에, 그것을 마주봤던 재현들이 변하는 것도 자명한 이치겠다. 루카치가 저주했던 ‘제2의 자연’은 정말로 ‘현실’이 되는 것이다.
5. 어쨌든 ‘그림’에서 푼크툼을 기대하는 것은, 농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김상우(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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