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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11.30 진중권-리얼리티, 버추얼리티, 액추얼리티 1
- 2008.11.29 작가 진기종 매체작업에 관한 단상: 이미지나라의 미디어키드의 진부한 모험
- 2008.11.29 작가 정흥섭_디지털 스투디움의 미학_그 파열의 순간을 기록하며
- 진중권-리얼리티, 버추얼리티, 액추얼리티
- 기술미학포럼/data
- 2008. 11. 30. 02:27
제 1회 기술미학포럼에서_진중권
본 문서는 2008년 11월 26일 기술 미학 연구회 주관으로 KT W style shop gallery에서 진행되었던 "제 1회 기술미학포럼: 리얼리티를 상상하는 시각의 충돌 정흥섭 vs 진기종"에서 진중권 교수가 진행한 발제 내용입니다.
리얼리티, 버추얼리티, 액추얼리티
놀라운 것은,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사진에 대한 관념에 알게 모르게 극적인 변화가 생겼다는 사실이다. 1930년대에 발터 베냐민이 사진이라는 매체에 주목했을 때, 사진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영역 너머에 있는 진리를 보여주는 기술로 여겨졌었다. 영화의 몽타주 언어 역시 외과의사의 메스처럼 현실을 분석적으로 해부하는 날카로운 시각을 발달시켜주고, ‘지금, 여기’의 제약을 초월해 체험을 확장시켜주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때 영화와 사진이라는 복제매체는 인간을 원본의 지각보다 더 현실에 가깝게 데려다 주는 기술이었다. 하지만 미디어 발전의 어느 시점에 이 매개된(mediated) 체험은 서서히 그 진정성을 의심받게 된다.
1950년대에 상업적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면서 세계의 체험은 방안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오늘날 인간의 세계 체험은 미디어에 매개된 것으로 변하여, 매개되지 않은 것은 아예 사회적으로 의미가 없는 사소한(trivial) 것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현실 자체가 미디어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세계 속에서 귄터 안더스는 이 매개된 체험의 진정성을 의심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흔히 ‘사실’(fact)라 부르는 것의 어원은 ‘만들어진 것’(factum)이라는 라틴어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우리의 것은 이미 ‘팬텀과 매트릭스’의 세계이며, 그 안에서는 사실 자체가 인위적으로 조작된 것, 현실 자체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가상을 불신하는가?” 미디어 철학자 빌렘 플루서는 ‘디지털 가상’이라는 짧은 에세이에서 이렇게 묻는다. 이 물음에 대한 전형적 답변은 귄터 안더스의 비관주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람들이 가상을 불신하는 이유는 물론 그것이 ‘존재론적으로 열등하며, 인식론적으로 거짓’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플루서는 가상의 불신자들을 향해 매우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가상만 거짓말을 하는가?” 이로써 그는 가상을 설명하는 플라톤적 패러다임의 전복을 시도한다. 한 마디로, ‘주어진 것’(datum)이 이미 ‘만들어진 것’(factum)으로 대체된 세계에서는 가상의 지위도 과거와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복제에서 합성의 리얼리즘으로
오늘날 현실 자체의 현실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기술 복제된 영상의 존재론적 지위다. 수공으로 제작된 회화와 달리, 사진은 그 놀라운 사실성 때문에 ‘현실’의 대명사로 여겨져 왔다. 사진의 공신력은 아마도 셔터가 열렸다 닫히는 짧은 순간 동안에는 인간의 개입이 완벽히 배제된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리얼리즘’은 현실의 리얼리즘이 아니라 ‘사진의 리얼리즘’(photorealism)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원본보다 복제를 더 신뢰한다. 가령 사건의 현장을 찍은 사진은, 그것을 직접 목격한 이의 증언보다 더 참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기계에는 의지가 없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모상이 만들어지는 순간에 인간의 손(mani)을 배제한다는 이유에서 사진이라는 매체는 조작(manipulation)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사진은 이미 찍기 전에 연출을 할 수 있고, 찍은 후에는 수정을 할 수 있으며, 연출이나 수정 없이도 이미지의 의미를 얼마든지 탈(脫)맥락화 할 수 있다. 프레임은 추상이다. 그것은 시간적 연속에서 하나의 순간을, 공간적 연장에서 하나의 단면을 떼어낸 것이다. 게다가 디지털과 더불어 사진은 이미 지표성(indexicality)을 잃어 버렸다. 사진은 복제 이미지에서 생성, 혹은 합성 이미지로 존재론적 위상이 바뀌었다. 이에 따라 사진을 더 이상 현실의 증언으로 보는 것은 힘들어졌다.
귄터 안더스는 이미 TV 생중계와 더불어 복제 이미지에 인식론적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어려워졌음을 지적한 바 있다. 원상(Bild)과 모상(Nachbild)사이에 존재하던 시간의 차이마저 사라지면, 모상은 대중의 의식 속에서 그대로 원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복제가 곧 현실이 되는 것이다. 더욱이 아예 지표성 자체가 없는 디지털 이미지의 경우, 거기에 현실과 일치하라는 인식론적 요구를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가령 CG는 그 본성이 사진이 아니라 만화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가상과 현실, 거짓과 진리를 구별하는 플라톤적 문제의식이 성립할 논리적 근거 자체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뉴미디어의 언어>에서 레프 마노비치는 디지털 이미지의 리얼리즘은 과거의 리얼리즘과 다를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컴퓨터로 만들어진 합성 이미지는 우리 현실을 열등하게 재현한 것이 아니라 다른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것이다.” 사진으로 찍히는 순간 현재는 과거가 된다. 사진은 피사체를 과거로 보낸다. 아날로그 복제 이미지의 원천이 이렇게 과거(“우리 현실”)에 있다면, 디지털 합성 이미지의 원천은 미래(“다른 현실”)에 있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열등한 재현이 아니라, 앞으로 도래할 미래의 사실적 재현이다. 여기서 이미지를 설명하는 철학적 준거는 플라톤에서 니체주의로 이행한다.
가상현실에서 현실가상으로
다시 플루서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현실은 과연 얼마나 현실적인 것일까?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위대한 철학자들은 ‘현실 자체가 가상’이라는 느낌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플라톤은 우리가 감각으로 보는 현실이란 한갓 가상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가 정신의 눈으로 보아야 할 진정한 실재는 이데아 세계라고 보았다. 플라톤과 철학적 대척점에 서 있었던 데모크리투스 역시 우리가 감각으로 보는 현실은 한갓 가상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가 보기에 진정한 실재는 원자들의 배열이었다. 서로 대립되는 철학의 두 가지 위대한 전통, 즉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표자가 모두 현실을 감각에 나타난 가상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플루서는 가상과 현실의 질적 차이를 입자들이 분포하는 ‘밀도’의 양적 차이로 환원시킨다.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그 차이는 점점 좁아질 것이며, 언젠가 그 차이가 궁극적으로 극복되면 가상이 곧 현실이 되는 시대가 올 것이라 예측한다. 그때가 되면 “가상은 현실만큼 실재적일 것이며, 현실은 가상만큼 유령스러워질 것이다.” 오늘날 테크놀로지는 존재의 생성단위와 기술적 조작단위가 일치하는 수준에 도달했다. 나노, 뉴런, 유전자, 픽셀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기술적 조작은 이미 있는 자연의 모방이 아니라 아직 없는 자연의 창조에 가까워진다. 복제는 원본이 되고, 가상은 현실이 된다. 가상은 더 이상 존재론적으로 열등하지 않다.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은 어느새 ‘현실가상’(real virtuality)이 되고 있다. 이는 가상의 존재론적 위상에 대한 관념에 변화가 있어야 함을 시사한다. 플라톤주의 관념 속에서 ‘virtuality’의 개념적 상관자는 ‘reality’로 상정된다. 거기서 가상은 이미 존재하는 현실에 대한 불충분한 대체물로서, 현실을 닮았으나 현실은 아니라는 이유에서 존재론적 의혹과 경멸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세계 자체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만들어진 것’으로 존재하는 디지털 시대에 가상은 미리 존재하는 현실을 자신의 원상으로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원천은 플루서가 말하는 “대안적 세계”, 다시 말하면 앞으로 도래할 미래에 있다.
디지털 이미지는 과거의 모상이 아니라 미래의 기획이다. 가상의 존재를 의심하는 플라톤주의는 여기서 가상의 생성을 긍정한 니체주의로 이행한다. 니체주의 관념은 virtuality을 아마도 그것의 어원인 ‘virtus’와 관련시켜 이해할 것이다. 이 라틴어 낱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arethe’는 어떤 존재가 자신의 잠재력을 남김없이 실현하며 살아가는 상태를 가리킨다. 디지털 이미지는 그 어원에 맞게 이미 존재하는 것을 열등하게 재현하는 ‘가상성’이 아니라, 아직 존재하지 않으나 실현시켜야 할 ‘잠재성’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경우 ‘virtuality'의 개념적 상관자는 아마도 'actuality'가 될 것이다. 우리의 것은 이미 reality-virtuality-actuality가 어지럽게 뒤섞인 혼합현실이다.
미디어적 에포케
진기종의 작품은 언뜻 보기에는 귄터 안더스처럼 TV 영상의 가상성을 폭로하는 작업으로 보인다. 만약 그랬다면, 그의 작업은 주제의 평범함 속에 갇혀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TV 속 가상에 대한 그의 태도는 복합적이다. 예를 들어 그는 황우석 연구의 진정성을 믿으며, 그의 사기극을 폭로한 미디어의 배후에 음모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그는 미디어가 거짓말을 할 때는 그것을 믿고, 미디어가 참말을 할 때는 그것을 불신하는 역설을 보여준다. 그 밖에도 그는 달 착륙이 나사와 할리우드의 연출이었다는 음모론에 끌리고, 상황을 인위적으로 연출한 ‘사기멘타리’임을 알면서도 다큐멘터리 채널을 즐겨 본다.
‘온 에어’에 등장하는 것은 CNN, 알자지라, YTN이라는 보도 채널, 그리고 디스커버리, 내셔널지오그래픽, 히스토리채널과 같은 다큐멘터리 채널이다. 텔레비전 방송 중에서 보도와 다큐멘터리 채널은 일반적으로 허구가 아니라 사실을 전달하는 프로그램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미디어의 사실(fact)이 결국 만들어진 것(factum)에 불과하다는 귄터 안더스의 말처럼, 진기종의 방송에서 관객이 보는 ‘사실’은 글자 그대로 일부러 조잡하게 만든 미니어처에 불과하다. 하지만 작가는 결코 계몽적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 오늘날 매체에 대한 대중의 태도는 이중적이어서, 그것의 허구성을 의식하는 가운데 거기에 몰입하려 하는 특성이 있다.
오늘날의 대중은 더 이상 ‘미디어에 몰입하는 것’과 ‘그것의 매개성을 의식하는 것’ 사이에 모순을 느끼지 않는다. 오늘날 ‘메이킹 오브’에 대한 취향은 미디어의 대상적 층위와 메타적 층위를 넘나드는 대중의 이 이중적 태도와 관련이 있다. 사실에 픽션을 섞은 팩션은 이미 대중의 취향이 되었다. 대중은 가상 앞에서 그것이 실재하는지, 아니면 허구적인지 굳이 가리려 하지 않는다. 이 존재론적 중립 속에서 대중은 때로는 허구를 실재로, 때로는 실재를 허구로 지각하면서 기꺼이 실재도 아니고 허구도 아닌 제3의 존재층에 머물러 있으려 한다. 진기종의 작업에서 우리는 이 미디어적 판단중지(epoche)의 태도를 본다.
가상의 업로딩
“사진에 찍히는 순간 현재는 과거가 된다.” 정흥섭은 사물과 이미지의 결별을 아쉬워한다. 그의 트롱프뢰유 작업에서 이미지는 사물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원상(Bild)과 모상(Nachbild)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서 원상과 모상은 일체가 되어 하나의 윤곽 안에 공존한다. 원본과 복제 사이에 존재하던 시간차가 극복될 때 가상은 곧 현실로 지각되는 경향이 있다. 사물에 덧붙여진 이미지는 그 사물을 시각적으로 반복함으로써 현실로 나타나는 가상, 다시 말하면 일종의 도플갱어와 같은 존재가 된다. 안더스는 TV 영상을 유령(Phantom)이라 불렀고, 플루서 역시 디지털 시대의 현실이 유령스러워질 것이라 예언했다.
‘트레인’에서 정흥섭은 매우 독특한 전략을 구사한다. 원래 시간적 차이가 없는 영상을 1초의 간격을 두고 나란히 보여줄 때,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가상의 공간이 탄생한다. 관객은 두 개의 영상이 끝날 때쯤에야 비로소 그것이 두 개의 다른 공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영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앞의 작업이 원상과 모상 사이의 시간차를 없애는 방식이었다면, ‘트레인’은 1초의 시간차를 둠으로써 하나의 영상을 각각 다른 장소를 보여주는 두 개의 영상으로 제시한다. 원래 존재하지 않는 이 1초의 시간차를 통해 원상은 유령이,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의 도플갱어가 된다.
진기종이 아날로그 방식으로 피사체를 연출한다면, 디지털 이미지를 사용하는 정흥섭은 피사체의 존재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그가 웹에서 발견한 이미지들은 컴퓨터 게임의 캐릭터처럼 아예 피사체가 없거나, 시뮬라크르의 자전 속에서 피사체와의 연관이 끊어진 것들이다. 일단 디지털로 변환되어 웹에 올라온 이상, 피사체를 가진 사진과 피사체가 없는 그래픽 사이의 차이는 인정되지 않는다. 권오상의 사진 조각이 모델을 직접 촬영한 사진들로 이루어진다면, 정흥섭의 재료는 순수한 시뮬라크르들이다. 확대에서 드러나는 부족한 해상도와 얼기설기 찢어 붙인 균열의 선을 허옇게 드러낸 채, 그는 이 시뮬라크르들을 현실에 등록시키려 한다.
실재는 얼마나 실재적이며, 가상은 얼마나 가상적인가? 각 시대는 제 나름대로 현실을 정의해 왔다. 고대인들에게 참된 실재는 이데아 세계에 있었고, 중세인들은 천상의 세계를 진정한 실재로 보았다. 근대인들에게 참된 실재가 의식의 아프리오리 한 형식으로 여겨졌다면, 데모크리투스의 후예인 현대의 과학자들은 실재를 아마도 ‘미립자들의 확률적 분포상태’로 규정할 것이다. 가상의 제작이 손에서 기계로, 기계에서 전자로, 그것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화함에 따라 ‘현실’에 대한 예술가들의 느낌도 변해왔다. 현실과 가상의 관계를 정의하는 것, 두 세계의 인터페이스를 디자인하는 것은 미디어 예술의 근본문제로 남을 것이다.
글.진중권(문화평론가, 중앙대 겸임교수)
- 작가 진기종 매체작업에 관한 단상: 이미지나라의 미디어키드의 진부한 모험
- 기술미학포럼/data
- 2008. 11. 29. 18:00
제 1회 기술미학포럼에서_작가 진기종
본 문서는 2008년 11월 26일 기술 미학 연구회 주관으로 KT W style shop gallery에서 진행되었던 "제 1회 기술미학포럼: 리얼리티를 상상하는 시각의 충돌 정흥섭 vs 진기종"에서 김상우씨가 진행한 작가 진기종에 대한 발제 내용입니다.
진기종 매체작업에 관한 단상: 이미지나라의 미디어키드의 진부한 모험
현실도, 상상도, 현실적인 상상도, 상상할 수 있는 현실도 모두 마치 동일한 존재론적 질서 속에 있는 것처럼 제시되므로, 그 결과 사건의 이미지 참조기능이 퇴색한다.(화이트)
1.
몇 년 전 황우석 사건은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아련하기까지 하지만, 사건이 남긴 상처는 매우 깊었다. 불치병 환자들은 치료할 희망을 꺾었고, 생명공학 분야는 발전의 탄력을 잃었고, 과학계는 조작의 오명을 뒤집어썼다. 뒤에서 지원했던 국가도 망신살이 단단히 뻗혔다. 거짓된 공상에 속아 넘어가, 엄청난 예산을 소모했기 때문이다. 보는 사람들도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과학을 보았고, 미래와 희망까지 잇달아 꿈꾸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상황은 1970년대 <대한늬우스>에 훈훈하게 등장함직한 희망찬 한국의 드라마였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주인공 황우석의 치명적인 과오가 밝혀졌기 때문이다. 상황은 급변했다. 살인사건만 없었지 어지간한 스릴러를 능가하는 장면들이 솟구쳤다. 장르도 불분명한 B급 영화 저리가라였다. 가관은 신문과 방송이었다.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했는지, 날이면 날마다 말과 영상을 쏟아냈다. 초기에는 황우석 복음을 전파하던 열렬한 사도였다가, 나중에는 태도를 바꿔 황우석 사기를 파헤치는 형사로 자처했다. 철면피도 이런 철면피가 없었다. 매체들은 자신도 속았다고 말한다.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일류과학자도 넘어가는 판에, 이류언론인이 무엇을 알겠는가. 하지만 그들의 시장감각만큼은 인류였다. 무엇이 잘 팔리는 담론인지, 어떻게 각색하고 연출해야 대중의 구미에 먹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선무당이 놀만한 굿판을 멋대로 만들고 나서, 장사가 안 되자 법정으로 무대를 바꿔 희생양 색출에 전념했다. 그것도 자신도 피해자처럼 행세하면서 말이다.
2.
진정한 피해자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진리’다. 매체는 진리를 포기함으로써 허약한 자신의 기반조차 팽개쳐 버렸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저 옛날 맥루한이 지적한 ‘전언’이지 않은가. 문제는 모두가 알아버렸다는 것이다. 진리의 믿음을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당연히 모든 담론에 종교의 흔적이 미치게 된다. 황우석 사건을 생각해 보라. 거짓과 사기로 판명됐지만, 그를 신처럼 숭배하는 무리는 여전하다. 종교는 세상을 이해하고 오해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이지 않는가. 하지만 값비싼 대가는 치러야 했다. 대타자의 균열은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근대주체의 여론이라 불렸던 ‘공론장’으로 부르든, 대중의 정체성을 손질하던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로 부르든, 이제는 아무 상관없다. 어떤 식으로든 진리를 보증하며, 믿음의 토대를 구축했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가상은 본질에 본질적이다.”(헤겔) 가상일지라도, 토대는 있어야 했다. 더구나, 균열이 일어났음에도, 현실로 가는 구멍은 열리지 않았다. 구멍 대신에 진리를 빨아 먹은 매체가 그 자리를 다시 차지한다. “대타자 대신 우리는 수많은 ‘소타자들’, 다시 말해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는 수많은 소부족들 얻게 된 것이다.”(지젝) 게다가 이제는 디지털이다. 매체들은 신형엔진을 달고서, 더욱 두텁게 현실을 둘러쌓았고, 주체는 쏟아져 나오는 온갖 기호와 정보들 때문에, 정보비만아로 추락한다. 그들은 사유하지 않는다. 대신에 매체의 폐쇄회로 속에서만 발효된 정보를 꾸역꾸역 먹기만 한다. 세계는 이미지들로 축소되고, 주체는 감각적 존재로 전락한다. 세계나 주체나 깊이 없이 납작하게 짓눌린다. “깊이없음은 은유적인 것만은 아니다.”(제임슨) 이것들이 진기종의 <방송중On Air>(2007)을 둘러싸는 맥락이다. 축소된 세계, 납작한 주체, 매체라는 폐쇄회로. 그곳에 출구는 있을까, 그는 과연 출구를 찾고 있을까.
3.
진기종의 <방송중>을 분석하기 전에, 우선 초기작업을 살펴보자. <혼자놀기>(2004), <내게 ‘뷁’스런 일들>(2004), <세계시체지도>(2004), 이 세 가지는 동일한 형식이다. 한쪽에 설치가 있고, 한쪽에 화면이 설치되며, 설치에 담긴 내용을 마우스형태의 ‘선추적기line tracer’가 담아서, 화면에 전송하는 구조다. <혼자놀기>는 작가가 써놓은 낙서를 실시간으로 외화하고, <내게 ‘뷁’스런 일들>은 대형의 ‘뷁’ 위에서 ‘뷁’의 유래를 설명하고, <세계시체지도>는 세계지도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추적한다. 여기서 선추적기는 설치와 화면을 잇는 고리다. ‘매개자’인 것이다. 그것의 기능은 작업마다 조금씩 변주된다. <혼자놀기>의 경우는 낙서로 표현된 작가의 의식을 폐쇄회로 텔레비전으로 감시하고(서대문형무소의 장소성), <세계시체지도>의 경우는 평화로운 세계의 뒷면에서 시체를 발굴하고, <내게 ‘뷁’스런 일들>의 경우는 고의로 글자를 왜곡해 화면을 어지럽힌다. 특히 ‘뷁’은 가독력literacy과 가시성을 중첩시켜, 인터넷에서 발생하는 언어현상을 진단한다. 형식의 측면에서 관객은 선추적기가 없으면 작업을 ‘보기가’ 힘들다.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안 볼 수 없는 구조다. 게다가 그것은 혼자서 멋대로 움직인다. 관객이 본다고 해도 원해서 보는 게 아니다. 감시, 발견, 왜곡, 결국 사람들이 그의 작품에서 발견하는 것들이고, 또한 매체의 전형적인 기능이기도 하다. 이렇게 정리해 보면, 진기종의 작업을 여느 매체작업으로 보기는 어렵다. 매체예술의 정의가 워낙 광범위한 탓에, 넣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매체를 활용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구현된 형식을 보면, 매체가 활용되고 들어갔을 뿐, 전형적인 설치작업으로 보는 게 알맞다. 그는 (선추적기라는) 매체로 (생각과 사실과 현상이) 매개되는 과정을, 그 경험을 전통의 형식으로 표현한 셈이다.
4.
<방송중On Air> 연작은 2006년에 등장했다. <CNN News Channel>, <Discovery Channel>, <National Geographic Channel>. 나중에 <Aljazeera>, <YTN>, <History Channel>, <Screen Test Tim>이 추가됐다. 작업들을 우선 짤막히 기술해 보자. 제목 그대로 작업들은 뉴스나 다큐멘터리처럼 세상의 창문을 소재로 삼았다. 뉴스로는 황우석의 사기사건과 911 테러사건이 등장한다. 두 가지 사건 모두 대타자의 분열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황우석 사건과 911 테러사건이 지나간 후 나타난 담론의 양상을 생각해 보라. 한국은 한국대로 미국은 미국대로 온갖 음모론이 창궐했다. 여기서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아니, 어떤 것도 진실을 보증하지 못했다. 하지만 ‘설명’은 필요했고, 균열을 메우는 가장 단순한 길을 찾는 바, 음모론이 제격이었다. 음모론은 망상에 사로잡힌 편집증의 사회적 판본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복음이지 설명이 아니다. 그러면 자연의 다큐멘터리는 조금 다를까. 조작의 손길은 다큐멘터리에도 작동한다. 자연보다 자연스럽게 연출하기 위해서 일종의 ‘세트’를 고안하는 것은 이제 상식에 가깝다. 그러니 무대로 재현할 수밖에. 세트에 설치된 허구의 사건들이 방송되는 것이다. 관객은 이 모든 것을 한 눈에 관조한다. 매체로 매개되는 현실도, 매체가 매개하는 방식도, 그 앞에는 동일한 지평에 있는 일이다. 마주보았던 현실과 재현은 친절하게 입 맞추며 자신이 무엇인지 잊어버린다. 작업에 등장하는 것들이 공허해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뉴스를 전하는 캐스터는 자동인형처럼 입 모양만 줄기차게 움직인다. 매개과정을 여러 번 거치며, 속내를 토해내기 때문이다. 복사를 여러 번 하면 글자조차 희미해지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이것들이 진기종이 포착한 내용들이자 응시하는 방식이다.
5.
이제 몇 가지 질문을 해보자. 첫째 작업의 연속성. 2004년의 세 가지 작업과 2006년의 <방송중> 연작은 분명히 구별된다. 형식의 측면에서 전자가 ‘매개’에 초점을 맞췄다면, 후자는 현실까지 끌어들여, 매체와 현실의 관계를 전면에 내세운다. 이것은 질료에도 영향을 끼친다. 후자에서 소재가 되는 사건들은 전자의 사건들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분석적이다. 솔직히 전자에서 소재들은 개인의 경험적 수준에 머물렀고, 수인경험, 시체찾기, 인터넷신조어 등등, 소재들도 균일하지 않았다. 특히 ‘뷁’의 경우는 정말로 뷁스럽다. (물론 개별작품이 제작되고 전시되는 맥락이 달랐기 때문일 수도 있다) 따라서 동일한 형식에 이런 저런 소재를 넣어본 결과라고밖에 보기가 어렵다. 하지만 <방송중> 연작은 다르다. (낡아 빠진 텔레비전 ‘형식’을 건들기는 하지만) 사회학적 칼날을 들이밀어, 작업의 ‘계열’을 엄밀히 구축한다. 이 때문에 2004년의 작업들이 삽화episode처럼 보인다면, <방송중> 연작은 탄탄한 단편소설로 보일 정도다. 작업의 물질적 외형도 훨씬 세련돼졌다. 전자까지만 해도, 설치와 화면의 관계는 우연적이었다. 솔직히 ‘설치’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세계시체지도, 작가의 낙서, ‘뷁’의 문자들은 동일한 형식의 ‘평면’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이 화면으로 투영되더라도, 별다른 ‘관계’를 만들지 못한다. 단순히 다른 화면으로 매개되는 것만 연출할 따름이다. 하지만 텔레비전 ‘형식’을 끌어오는 순간, 둘의 관계는 논리적으로 변모한다. 전통적인 세계와 재현의 문제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전자와 후자의 단절은 매우 깊어 보인다. 그리고 왜 ‘텔레비전’이었을까. 텔레비전이 현실을 왜곡하는 장치라는 것은 지금도 변함없다. 하지만 그러한 진단은 이미 오래전에 내려졌다. 진기종이 정말로 동시대적 관심을 기울였다면, 지적된 사회학적 칼날을 살아 있게 하려면, 텔레비전보다 중요한 현안과 장치를 ‘발견’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진부한 것은 어쩔 수 없다.
6.
작업의 완성도도 지적해야겠다. 진기종의 작업은 탄탄한 완성도를 자랑한다. 특히 작업 가운데 수작업으로 꼼꼼히 제작한 설치를 보면, 저절로 탄성이 나올 정도다. 정밀하게 구축된 디오라마 같아서, 어느 것 하나 빼놓기 어렵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작업을 수용할 때, 작업의 개념을 이해할 때 장애가 된다. 너무 잘 만들었기 때문이라니, 역설처럼 들지만 사실이 그렇다. 마치 잘 만든 물건의 세련된 외형에 끌리는 것처럼, 작업 그 자체로 시각을 옭아맨다. 일종의 물신처럼 말이다. 이것은 작업의 완결성으로 이어진다. 작업의 외부를 상상하기 어렵게 하는 것이다. 텔레비전을 소재로 선택한 것도 이 점을 강화시킨다. 진부하기 때문이다. 결국 현실과 팽팽한 긴장을 상실한 ‘우의’가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관객이 개입할 틈새도 제거된다. 그로서는 생각할 필요 없이 그저 멀리서 관조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7.
아사다 아키라는 매체의 폐쇄회로에 갇히는 현상을 전자모체증후군electronic mother synthrome으로 명명한다.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것을 일러주는 매체들, 그것은 매체로 탈바꿈한 어머니며, 주체의 잃어버린 반쪽이다.("도주론" 38쪽) 진기종은 어디서 무엇을 보고 있을까. 그 역시 테크노키즈의 길을 따라 갈 것인가, 아니면 바깥을 열고서 거친 대지를 찾아 갈 것인가. 적어도 관조하는 시선으로는 어려울 것이다.
글.김상우(독립 큐레이터)
- 작가 정흥섭_디지털 스투디움의 미학_그 파열의 순간을 기록하며
- 기술미학포럼/data
- 2008. 11. 29. 17:55
제 1회 기술미학포럼에서_작가 정흥섭
본 문서는 2008년 11월 26일 기술 미학 연구회 주관으로 KT W style shop gallery에서 진행되었던 "제 1회 기술미학포럼: 리얼리티를 상상하는 시각의 충돌 정흥섭 vs 진기종"에서 앨리스온 디렉터 유원준씨가 진행한 작가 정흥섭에 대한 발제 내용입니다.
발제 내용의 각주는 첨부 문서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발제 내용의 각주는 첨부 문서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디지털 스투디움의 미학 _ 그 파열의 순간을 기록하며 : 작가 정흥섭
“앤디 워홀에 관한 모든 것을 알기를 원한다면, 바로 내 그림들과 영화들과 나의 표면을 봐라. 거기에 내가 있다. 그 배후에는 아무 것도 없다” : Andy Warhol
토마스 크로우(Thomas Crow)는 워홀(Warhol)의 전기 의자 이미지들로 구성된 작품을 마주하며 그를 사형 제도에 반대하는, 또한 미국적 상처에 주목하는 작가로서 분석하였다. 이러한 그의 분석은 당시의 팝 아트, 그리고 워홀에 대한 일반적 분석 – 대상을 탈 상징화하는 것 – 과는 노선을 달리한다. 그러나 워홀은 위의 언급에 머무르지 않고, 다음과 같은 말을 잇는다.
“죽음 연작을 하는 데에 대한 심오한 이유란 없었으며, 그들이 시대의 희생자였던 것도 아니다. 다시 말해 그것을 하는 데에 대한 이유는 전혀 없었으며, 단지 표면적인 이유밖에는 없었다.” : Andy Warhol
위와 같은 워홀의 언급은, 일견 당시의 팝 이미지들에 대한 분석에 힘을 실어주는 듯 하지만, 또한 굉장히 역설적으로도 들리기 때문에 어떠한 측면에서의 접근이 더욱 유용한가? 라는 질문을 무색하게 만든다. 다만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워홀은 자신의 작품 속에서 이미지가 지닌 외상적 실재를 이용하여 그것을 고정시키고, 가리고, 다시 그것을 생산하는 일련의 작업을 반복하며, 이미지에 의해 건드려진 주체의 지각과 의식 사이에서 파열을 발생시켰던 듯 하다. 헬 포스터는 이러한 그의 시도들을 ‘외상적 리얼리즘’의 특성으로 간주한다.
글의 서두에서 워홀과 그의 작품 분석(헬 포스터 등의)을 소개하는 이유는 오늘 만나볼 작가 정흥섭의 작품에서도 이와 같은 논의의 전개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흥섭은 가상의 이미지들을 출력하여 현실에서 이어붙이기를 시도한다. 이러한 그의 작업의 과정은 ‘현실을 반영하는 가상적 이미지의 포착 -> 가상적 이미지의 출력 -> 현실을 구성하는 가상 이미지 구축’ 이라는 도식에 따라 위와 같은 외상적 리얼리즘의 흔적을 드러내는 듯 하다. 즉, 그는 가상으로 점철된 현실의 이미지를 오리고 접고 붙여서 다시 그러한 가상을 재조합하는 행위를 통해 우리의 실재적 현실을 직시하고 가상 자체를 현실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작업 과정은 실재 그 지시 대상이 예전 사진 이미지가 내포한 도상학적 주제 내지는 세상 속의 실재 사물과의 관계성이 모호한 지점에서 과거의 접근과는 다른 접근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분명, 디지털이 만들어낸 원본없는 이미지의 세계가 또 다른 포인트를 작가에게 제공한 셈이다. 디지털 이미지는 태생적으로 모호한 자기 지시성을 내포한다. 분명 현실에 기반을 둔 개념으로부터 출발한 것임에는 분명한데, 복제와 조합을 반복하다보면 원래의 원본 개념과는 다른 별개의 개념이 담긴 이미지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 주변의 이미지들도 어느덧 이러한 이중적인 차원의 전략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정흥섭은 우리 주변의 ‘익숙하지만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고 있지만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주변의 이미지들을 포섭하여 자신이 그려내는 가상-실재의 모호한 경계선 위에 펼쳐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피에르 레비(Pierre levy)의 가상과 실재에 관한 논의를 떠올려보자. 레비는 가상과 실재를 반대되는 개념이 아닌 존재의 다른 방식이라고 언급하며, 즉각적이고 물리적인 존재의 단조로움 속에 의미를 부여한다. 정흥섭의 이미지 또한, 이러한 레비의 언급과 가상과 실재의 중첩된 부분을 제시함에 있어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그가 포착한 가상의 이미지들은 현실감을 상실하는 것이 아니라 정체성이 변환되어 실재 세계 속으로 투영되는 것이며, 그가 조합한 가상의 이미지들은 현실화된 가상성으로서 실체를 구성하게 된다.
그러나 작가 정흥섭은 ‘가상화’ 자체가 현실을 창조하는 하나의 주요한 수단으로서 제시될 때 발생하는 이미지의 피상성에서 일종의 연민을 느끼는 듯 하다. 그의 작업 <project 2006 ‘self-camera’>를 살펴보자. 사이버 세상 속의 떠도는 이미지들은 현실에 바탕을 둔 이미지임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가상적이다. 작가는 지시적인 깊이의 부족과 주관적 내면성의 결여로 인해 발생한 이미지의 얕은 피상성들을 여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보드리야르가 팝 아트의 특성을 분석하며 대상이 지닌 의미로부터 시뮬라크라한 표면에로 이미지를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언급했다면, 정흥섭은 그러한 이미지의 해방에 의해 소외된 현실과의 연계성과 자기지시성의 부재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러한 그의 전략은 얇은 종이로 된 출력물을 통해 가시화되며, 숨겨진 외상적 실재를 드러내기 위한 찢어 붙힌 이미지로서 표출된다. 이러한 그의 작업 속에 등장하는 이미지들을 살펴보자. 그가 포착한 이미지들은 우리의 환경 속으로 가상적 이미지의 침투가 얼마만큼 많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화면 속의 (현재까지의) 평면적 이미지들은 우리의 뇌를 세뇌시켜 차원의 벽을 넘어 인식되고는 있다지만, 여전히 그것들은 가볍고 허구적인 것들이라는 것을 작가는 알고 있다. 또한 그러한 이미지들의 이상향이 현실 세계에 근거하고 있다는 확신을 가진 듯 하다. 따라서 그의 작업에서 허구적 이미지들이 실재를 구성하는 중책을 맡게 되었지만, 아직도 여전히 무게감 없게 소모되는 현실을 반영한다.
이제 그의 작업 속에 감추어진 하나의 전략을 살펴보자. 정흥섭은 디지털 매체의 미덕이라 볼 수 있는 자기 복제성을 과거의 인쇄 매체 속에 담아 표현하고 있다. 무한히 반복될 수 있는 디지털 이미지의 가상 세계를 작가는 모더니즘 회화에서 사용되었던 일종의 토톨로지(동어반복)적 구조로서 이해한다. 즉, 그에게 있어 가상과 실재는 하나의 진리에 대한 토톨로지적 구조를 드러내는 현상으로 존재하며, 전략적으로 인쇄 매체의 복제성을 빌어 표현한다. <FIFA 2005>, <윤두서> 등의 작품들에서 관찰되는 거칠게 조합된 인쇄 매체들의 얇은 표면성은 외상적 실재의 한 양상을 여실하게 드러내고 있는데, 이러한 지점은 라깡의 ‘투셰(tuche)’ 혹은 ‘바르트의 푼크툼(punctum)’으로 설명되는 주체의 지각과 의식 사이의 파열의 순간을 가시화한다. 다만, 그의 작품에서의 보여지는 차별적 지점은 그러한 개념들이 주체 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객체로서의 작품에 직접적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 또한 작품의 몸체를 구성하는 가상적 이미지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스스로의 의식 파열 순간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일 수 있다. 꿈이 실재로 넘어오는 순간 소멸한다는 보드리야르의 말처럼 디지털 이미지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가상적 오브제들은 스스로의 이상향인 실재에 발을 딛는 순간, 스스로의 피상성에 의해 파열되는 운명에 처하고 만다. 작가 정흥섭은 디지털화 된 스투디움의 상태들을 깨트리는, 혹은 스스로 파열되는 그러한 순간들을 제시함으로서 자신도 모르게 설득되고 마는 우리의 가상적 현실을 반추한다. 그러나 ‘디지털로 도배된 현실의 가상화는 과연 그렇게 파열될 수 밖에 없는 것일까’라는 의문은 여전히 남게된다.
글. 유원준 (앨리스온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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