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진기종 매체작업에 관한 단상: 이미지나라의 미디어키드의 진부한 모험

제 1회 기술미학포럼에서_작가 진기종


본 문서는 2008년 11월 26일 기술 미학 연구회 주관으로 KT W style shop gallery에서 진행되었던 "제 1회 기술미학포럼: 리얼리티를 상상하는 시각의 충돌 정흥섭 vs 진기종"에서 김상우씨가 진행한 작가 진기종에 대한 발제 내용입니다.
 


진기종 매체작업에 관한 단상: 이미지나라의 미디어키드의 진부한 모험


현실도, 상상도, 현실적인 상상도, 상상할 수 있는 현실도 모두 마치 동일한 존재론적 질서 속에 있는 것처럼 제시되므로, 그 결과 사건의 이미지 참조기능이 퇴색한다.(화이트)

1.
몇 년 전 황우석 사건은 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아련하기까지 하지만, 사건이 남긴 상처는 매우 깊었다. 불치병 환자들은 치료할 희망을 꺾었고, 생명공학 분야는 발전의 탄력을 잃었고, 과학계는 조작의 오명을 뒤집어썼다. 뒤에서 지원했던 국가도 망신살이 단단히 뻗혔다. 거짓된 공상에 속아 넘어가, 엄청난 예산을 소모했기 때문이다. 보는 사람들도 난감하긴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과학을 보았고, 미래와 희망까지 잇달아 꿈꾸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상황은 1970년대 <대한늬우스>에 훈훈하게 등장함직한 희망찬 한국의 드라마였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주인공 황우석의 치명적인 과오가 밝혀졌기 때문이다. 상황은 급변했다. 살인사건만 없었지 어지간한 스릴러를 능가하는 장면들이 솟구쳤다. 장르도 불분명한 B급 영화 저리가라였다. 가관은 신문과 방송이었다.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했는지, 날이면 날마다 말과 영상을 쏟아냈다. 초기에는 황우석 복음을 전파하던 열렬한 사도였다가, 나중에는 태도를 바꿔 황우석 사기를 파헤치는 형사로 자처했다. 철면피도 이런 철면피가 없었다. 매체들은 자신도 속았다고 말한다.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일류과학자도 넘어가는 판에, 이류언론인이 무엇을 알겠는가. 하지만 그들의 시장감각만큼은 인류였다. 무엇이 잘 팔리는 담론인지, 어떻게 각색하고 연출해야 대중의 구미에 먹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선무당이 놀만한 굿판을 멋대로 만들고 나서, 장사가 안 되자 법정으로 무대를 바꿔 희생양 색출에 전념했다. 그것도 자신도 피해자처럼 행세하면서 말이다.

2.
진정한 피해자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진리’다. 매체는 진리를 포기함으로써 허약한 자신의 기반조차 팽개쳐 버렸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저 옛날 맥루한이 지적한 ‘전언’이지 않은가. 문제는 모두가 알아버렸다는 것이다. 진리의 믿음을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당연히 모든 담론에 종교의 흔적이 미치게 된다. 황우석 사건을 생각해 보라. 거짓과 사기로 판명됐지만, 그를 신처럼 숭배하는 무리는 여전하다. 종교는 세상을 이해하고 오해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이지 않는가. 하지만 값비싼 대가는 치러야 했다. 대타자의 균열은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근대주체의 여론이라 불렸던 ‘공론장’으로 부르든, 대중의 정체성을 손질하던 ‘이데올로기 국가장치’로 부르든, 이제는 아무 상관없다. 어떤 식으로든 진리를 보증하며, 믿음의 토대를 구축했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가상은 본질에 본질적이다.”(헤겔) 가상일지라도, 토대는 있어야 했다. 더구나, 균열이 일어났음에도, 현실로 가는 구멍은 열리지 않았다. 구멍 대신에 진리를 빨아 먹은 매체가 그 자리를 다시 차지한다. “대타자 대신 우리는 수많은 ‘소타자들’, 다시 말해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는 수많은 소부족들 얻게 된 것이다.”(지젝) 게다가 이제는 디지털이다. 매체들은 신형엔진을 달고서, 더욱 두텁게 현실을 둘러쌓았고, 주체는 쏟아져 나오는 온갖 기호와 정보들 때문에, 정보비만아로 추락한다. 그들은 사유하지 않는다. 대신에 매체의 폐쇄회로 속에서만 발효된 정보를 꾸역꾸역 먹기만 한다. 세계는 이미지들로 축소되고, 주체는 감각적 존재로 전락한다. 세계나 주체나 깊이 없이 납작하게 짓눌린다. “깊이없음은 은유적인 것만은 아니다.”(제임슨) 이것들이 진기종의 <방송중On Air>(2007)을 둘러싸는 맥락이다. 축소된 세계, 납작한 주체, 매체라는 폐쇄회로. 그곳에 출구는 있을까, 그는 과연 출구를 찾고 있을까.

3.
진기종의 <방송중>을 분석하기 전에, 우선 초기작업을 살펴보자. <혼자놀기>(2004), <내게 ‘뷁’스런 일들>(2004), <세계시체지도>(2004), 이 세 가지는 동일한 형식이다. 한쪽에 설치가 있고, 한쪽에 화면이 설치되며, 설치에 담긴 내용을 마우스형태의 ‘선추적기line tracer’가 담아서, 화면에 전송하는 구조다. <혼자놀기>는 작가가 써놓은 낙서를 실시간으로 외화하고, <내게 ‘뷁’스런 일들>은 대형의 ‘뷁’ 위에서 ‘뷁’의 유래를 설명하고, <세계시체지도>는 세계지도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추적한다. 여기서 선추적기는 설치와 화면을 잇는 고리다. ‘매개자’인 것이다. 그것의 기능은 작업마다 조금씩 변주된다. <혼자놀기>의 경우는 낙서로 표현된 작가의 의식을 폐쇄회로 텔레비전으로 감시하고(서대문형무소의 장소성), <세계시체지도>의 경우는 평화로운 세계의 뒷면에서 시체를 발굴하고, <내게 ‘뷁’스런 일들>의 경우는 고의로 글자를 왜곡해 화면을 어지럽힌다. 특히 ‘뷁’은 가독력literacy과 가시성을 중첩시켜, 인터넷에서 발생하는 언어현상을 진단한다. 형식의 측면에서 관객은 선추적기가 없으면 작업을 ‘보기가’ 힘들다.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안 볼 수 없는 구조다. 게다가 그것은 혼자서 멋대로 움직인다. 관객이 본다고 해도 원해서 보는 게 아니다. 감시, 발견, 왜곡, 결국 사람들이 그의 작품에서 발견하는 것들이고, 또한 매체의 전형적인 기능이기도 하다. 이렇게 정리해 보면, 진기종의 작업을 여느 매체작업으로 보기는 어렵다. 매체예술의 정의가 워낙 광범위한 탓에, 넣을 수도 있겠다. 어쨌든 매체를 활용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구현된 형식을 보면, 매체가 활용되고 들어갔을 뿐, 전형적인 설치작업으로 보는 게 알맞다. 그는 (선추적기라는) 매체로 (생각과 사실과 현상이) 매개되는 과정을, 그 경험을 전통의 형식으로 표현한 셈이다.

4.
<방송중On Air> 연작은 2006년에 등장했다. <CNN News Channel>, <Discovery Channel>, <National Geographic Channel>. 나중에 <Aljazeera>, <YTN>, <History Channel>, <Screen Test Tim>이 추가됐다. 작업들을 우선 짤막히 기술해 보자. 제목 그대로 작업들은 뉴스나 다큐멘터리처럼 세상의 창문을 소재로 삼았다. 뉴스로는 황우석의 사기사건과 911 테러사건이 등장한다. 두 가지 사건 모두 대타자의 분열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황우석 사건과 911 테러사건이 지나간 후 나타난 담론의 양상을 생각해 보라. 한국은 한국대로 미국은 미국대로 온갖 음모론이 창궐했다. 여기서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아니, 어떤 것도 진실을 보증하지 못했다. 하지만 ‘설명’은 필요했고, 균열을 메우는 가장 단순한 길을 찾는 바, 음모론이 제격이었다. 음모론은 망상에 사로잡힌 편집증의 사회적 판본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복음이지 설명이 아니다. 그러면 자연의 다큐멘터리는 조금 다를까. 조작의 손길은 다큐멘터리에도 작동한다. 자연보다 자연스럽게 연출하기 위해서 일종의 ‘세트’를 고안하는 것은 이제 상식에 가깝다. 그러니 무대로 재현할 수밖에. 세트에 설치된 허구의 사건들이 방송되는 것이다. 관객은 이 모든 것을 한 눈에 관조한다. 매체로 매개되는 현실도, 매체가 매개하는 방식도, 그 앞에는 동일한 지평에 있는 일이다. 마주보았던 현실과 재현은 친절하게 입 맞추며 자신이 무엇인지 잊어버린다. 작업에 등장하는 것들이 공허해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 뉴스를 전하는 캐스터는 자동인형처럼 입 모양만 줄기차게 움직인다. 매개과정을 여러 번 거치며, 속내를 토해내기 때문이다. 복사를 여러 번 하면 글자조차 희미해지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이것들이 진기종이 포착한 내용들이자 응시하는 방식이다.

5.
이제 몇 가지 질문을 해보자. 첫째 작업의 연속성. 2004년의 세 가지 작업과 2006년의 <방송중> 연작은 분명히 구별된다. 형식의 측면에서 전자가 ‘매개’에 초점을 맞췄다면, 후자는 현실까지 끌어들여, 매체와 현실의 관계를 전면에 내세운다. 이것은 질료에도 영향을 끼친다. 후자에서 소재가 되는 사건들은 전자의 사건들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분석적이다. 솔직히 전자에서 소재들은 개인의 경험적 수준에 머물렀고, 수인경험, 시체찾기, 인터넷신조어 등등, 소재들도 균일하지 않았다. 특히 ‘뷁’의 경우는 정말로 뷁스럽다. (물론 개별작품이 제작되고 전시되는 맥락이 달랐기 때문일 수도 있다) 따라서 동일한 형식에 이런 저런 소재를 넣어본 결과라고밖에 보기가 어렵다. 하지만 <방송중> 연작은 다르다. (낡아 빠진 텔레비전 ‘형식’을 건들기는 하지만) 사회학적 칼날을 들이밀어, 작업의 ‘계열’을 엄밀히 구축한다. 이 때문에 2004년의 작업들이 삽화episode처럼 보인다면, <방송중> 연작은 탄탄한 단편소설로 보일 정도다. 작업의 물질적 외형도 훨씬 세련돼졌다. 전자까지만 해도, 설치와 화면의 관계는 우연적이었다. 솔직히 ‘설치’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세계시체지도, 작가의 낙서, ‘뷁’의 문자들은 동일한 형식의 ‘평면’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이 화면으로 투영되더라도, 별다른 ‘관계’를 만들지 못한다. 단순히 다른 화면으로 매개되는 것만 연출할 따름이다. 하지만 텔레비전 ‘형식’을 끌어오는 순간, 둘의 관계는 논리적으로 변모한다. 전통적인 세계와 재현의 문제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전자와 후자의 단절은 매우 깊어 보인다. 그리고 왜 ‘텔레비전’이었을까. 텔레비전이 현실을 왜곡하는 장치라는 것은 지금도 변함없다. 하지만 그러한 진단은 이미 오래전에 내려졌다. 진기종이 정말로 동시대적 관심을 기울였다면, 지적된 사회학적 칼날을 살아 있게 하려면, 텔레비전보다 중요한 현안과 장치를 ‘발견’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진부한 것은 어쩔 수 없다.

6.
작업의 완성도도 지적해야겠다. 진기종의 작업은 탄탄한 완성도를 자랑한다. 특히 작업 가운데 수작업으로 꼼꼼히 제작한 설치를 보면, 저절로 탄성이 나올 정도다. 정밀하게 구축된 디오라마 같아서, 어느 것 하나 빼놓기 어렵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작업을 수용할 때, 작업의 개념을 이해할 때 장애가 된다. 너무 잘 만들었기 때문이라니, 역설처럼 들지만 사실이 그렇다. 마치 잘 만든 물건의 세련된 외형에 끌리는 것처럼, 작업 그 자체로 시각을 옭아맨다. 일종의 물신처럼 말이다. 이것은 작업의 완결성으로 이어진다. 작업의 외부를 상상하기 어렵게 하는 것이다. 텔레비전을 소재로 선택한 것도 이 점을 강화시킨다. 진부하기 때문이다. 결국 현실과 팽팽한 긴장을 상실한 ‘우의’가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관객이 개입할 틈새도 제거된다. 그로서는 생각할 필요 없이 그저 멀리서 관조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7.
아사다 아키라는 매체의 폐쇄회로에 갇히는 현상을 전자모체증후군electronic mother synthrome으로 명명한다.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것을 일러주는 매체들, 그것은 매체로 탈바꿈한 어머니며, 주체의 잃어버린 반쪽이다.("도주론" 38쪽) 진기종은 어디서 무엇을 보고 있을까. 그 역시 테크노키즈의 길을 따라 갈 것인가, 아니면 바깥을 열고서 거친 대지를 찾아 갈 것인가. 적어도 관조하는 시선으로는 어려울 것이다.

글.김상우(독립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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